학회게시판
이부자리를 세탁하고,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데, 440명이나 되니까 학교 직원만으로는 여력이 안 되었다. 이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퇴직 직원 10여 분이 이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것도 완전 무료 봉사로 -. 지금도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교육부에 보고했더니 전국에 이런 사례가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대학 안에서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공동체 정신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한 공동체 정신은 우리 스스로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역 간의 벽도 허물고, 나라와 나라도 하나로 잇고 있다. 공동체정신의 부활과는 대조적으로 사라진 것도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쑥 들어간 것이다. 대한민국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사회구나, 살만한 나라구나라는 인식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로 하여금 잊고 살았던 우리 안의 보물을 재발견하고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시대의 동학사상 - 공화와 평화
나의 평생 연구주제는 동학이다. 그래서 동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원광대학교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원불교사상연구원의 멤버들이 참여한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 -한국사회 COVID19 시민백서](모시는사람들)에 보면 ‘관민상화(官民相和)’라는 말이 나온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전주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 장군이 서로 약속을 하였다. 탐관오리들이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동학도를 탄압하는 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동학군은 해산하겠다고-. 이것이 ‘전주화약(全州和約)’이다. 이런 식으로 양자가 화약을 맺어, 동학군은 자진 해산을 하고, 전라감사는 동학군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였다. 이것을 ‘관민상화’라고도 한다. 이 전통이 21세기에 부활해서 코로나19 사태라는 지구적 재난 앞에서 ‘민관협치’의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성공적인 ‘민관협치’는 코로나19 초기에 일본의 <산케이신문>에서도 평가한 적이 있다.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에서는 이것을 대한민국의 ‘공화(共和)’의 출발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동학은 공화와 함께 평화도 말하고 있다. 작년(2019)이 마침 3·1운동 100주년이었다. 주지하다시피 3·1운동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가 기획한 평화운동이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기회주의자다’ ‘끝까지 지켜야지’ ‘비겁하다’ ‘타협주의다’라며 비판했다. 그런데 작년 100주년 때에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기미독립선언서>의 평화사상에 모든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주의로 일관하고 있고, 특히 맨 마지막의 '공약삼장'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3·1운동을 주도했던 33인 가운데 15명이 천도교인이었다. 그 15명의 지도자들의 이력을 분석했더니, 그중의 3분 2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었다. 그래서 3·1운동은 인적(人的) 구성에 있어서 명확하게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도 사실은 평화운동이었다. 1997년에 일본 도쿄의 외교사료관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도부가 내린 공문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로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 목숨을 해치지 않도록 하고, 행진할 때는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말고, 효자 충신 열녀 존경하는 학자들이 사는 동네 10리 안에는 절대 주둔하지 말라. 굶주린 자는 먹여주고 병든 자 치료해 주고 도망가는 자 쫓지 말고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라 팔아먹는 자들은 제대로 벌주고, 부정부패하는 지방관들은 척결하고, 불효자는 벌 줘라.”
<동학군 12개조 규율>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이다. <12개조 규율>은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모든 군대는 행군을 하거나 훈련을 하거나 할 때 직간접적으로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기 쉽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의 민폐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군대이기 때문에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봉기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학군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이라는 책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살림의 혁명’이라고 하였고, 동학농민군을 ‘살림의 군대’라고 표현하였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고 한 혁명이자 군대였다는 것이다.
코로나시대의 동학사상 - 신분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
동학은 공화와 평화뿐만 아니라 평등도 지향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황해도 동학조직의 접주(리더)로 활동하고 있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선생이 동학에 뛰어든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백범’이라는 호는 ‘평민’ ‘보통사람’ ‘상민’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사회는 원칙적으로 상민이나 평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 그래서 백범도 지방의 과거시험인 향시에 응시하러 갔는데, 가진 자들에 의해 과거제도가 농락을 당해서 세력 있는 집안의 자제들의 합격이 이미 정해져 있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평민 출신, 상민 출신인 백범은 처음부터 합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기 좋게 떨어지고, “아! 나는 안 되나 보다” 하고, 사주관상이나 배워서 먹고 살자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위에서 동학 수련을 잘 해서 바람도 부르고 비도 부르고 축지법을 쓰는 동학 선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 귀가 솔깃해서 그 선생을 찾아갔다.
-계속-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