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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The Research Institute of Won-buddhist Thought  

간행도서

제목

원불교 구인선진 개벽을 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7.24
첨부파일1
추천수
0
조회수
841
내용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도와 교단 창립과 발전의 초석(礎石)을 다진 아홉 제자(九人先進)의 삶과 사상을 16명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최초의 학문적 성과물이다. 평범한 조선의 서민, 향촌 지식인들이 한 선각자의 지도 속에서 종교적 선진(先進)으로 성장하여 활동하고, 한국 자생의 세계적인 종교로서의 원불교를 조형(造形)하는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과 의의를 밝혔다.

 

 


저 : 저 자 소 개

양은용 원광대 명예교수, 한국종교학회장 역임
이용재 영산선학대학교 교수
이경열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무처장, 원광대 대학교당 주임교무 역임
유지원 원광대 사학과 교수, 원광대 한중역사문화연구소장
이성전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불교 수위단원
김귀성 원광대 교육학과 교수, 한국종교교육학회장 역임
박광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장
김영두 원광대 명예교수, 호주 원광선문화원 교령
정성미 원광대 사학과 조교수, 호남지방고문서연구회 전임연구원 역임
백준흠 원불교 정책연구소장,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강사
이경옥 영산선학대학교 교수, 한겨레중고등학교 행정실장 역임
최미숙 원불교 교정원 교육부 과장, 원광대 강사
류성태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장
허남진 원광대 연구교수, 한국학심화사전편찬과제 박사급 연구원
조성면 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문학평론가
김미경 전주대 연구교수, 스토리텔링 작가


제1부_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선진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선진 /양은용  
Ⅰ. 머리말 Ⅱ. 소태산의 대각개교와 구인선진  
Ⅲ. 교단 창업에서 구인선진의 역할 Ⅳ. 구인선진의 교단사적 위치  
Ⅴ. 맺음말

구인선진과 영산성지 /이용재 
Ⅰ. 머리말 Ⅱ. 구인선진의 출신과 소태산과의 만남  
Ⅲ. 영산성지에서 소태산과 구인선진의 교단 창립 활동Ⅳ. 구인선진에게 영산성지는 어떠한 장소인가  
Ⅴ. 맺음말  

구인선진의 법인성사 /이경열  
Ⅰ. 머리말 Ⅱ. 법인성사의 시대적 배경  
Ⅲ. 법인성사의 개념과 의미 Ⅳ. 법인성사를 실현하는 길  
Ⅴ. 맺음말  

조합운동을 통해 본 구인선진의 종교적 구현 /유지원  
Ⅰ. 머리말 Ⅱ. 조합운동의 실제와 그 정신  
Ⅲ. 조합운동에 나타난 종교적 구현 Ⅳ. 맺음말  

제2부 구인선진의 생애와 사상  

구인의 중앙 ‘정산 종사’ /이성전  
Ⅰ. 머리말 Ⅱ. 생애  
Ⅲ. 사상 Ⅳ. 맺음말  

일산 이재철 종사의 생애와 사상 /김귀성  
I. 머리말 Ⅱ. 일산의 생애 
Ⅲ. 일산의 사상 Ⅳ. 맺음말 : 남겨 주신 법훈  

이산 이순순 종사의 생애와 실천적 삶 /박광수  
Ⅰ. 머리말 Ⅱ. 이산의 생애와 소태산과의 만남 
Ⅲ. 조합운동과 방언공사 참여와 실천 Ⅳ. 혈인기도 참여와 그 종교적 의미
Ⅴ. 재가생활과 수행공부 : 외정정 내정정의 수행 Ⅵ. 맺음말  

삼산 김기천 종사의 생애와 사상 /김영두  
Ⅰ. 머리말 Ⅱ. 삼산의 생애  
Ⅲ. 교단 최초의 견성인가 Ⅳ. 소태산과의 문답에 나타난 사상 
Ⅴ. 시가에 나타난 사상 Ⅵ. 『철자집』의 구성과 사상  
Ⅶ. 맺음말  

사산 오창건 종사의 생애와 사상 /정성미  
Ⅰ. 머리말 Ⅱ. 출생과 성품  
Ⅲ. 교단 입문과 활동 Ⅳ. 사산 오창건사산의 인간상  
Ⅴ. 맺음말  

오산 박세철 종사의 생애와 인품 /백준흠  
Ⅰ. 머리말 Ⅱ. 오산의 출생과 열반  
Ⅲ. 소태산과의 인연 Ⅳ. 오산의 주요 활동  
Ⅴ. 오산 인품의 특징 Ⅵ. 맺음말  

육산 박동국 종사의 생애와 사상: 이 사업에 큰 창립주 되리라 /이경옥  
Ⅰ. 머리말 Ⅱ. 육산의 생애
Ⅲ. 육산의 사상 291 Ⅳ. 육산의 일가  
Ⅴ. 맺음말  

칠산 유건 종사의 생애와 사상 /최미숙  
Ⅰ. 머리말 Ⅱ. 칠산의 생애  
Ⅲ. 칠산의 행적 및 사상 Ⅳ. 맺음말  

팔산 김광선 종사의 생애와 활동 /류성태  
Ⅰ. 머리말 Ⅱ. 팔산의 생애  
Ⅲ. 교조 소태산과의 인연 Ⅳ. 팔산의 교단 활동  
Ⅴ. 팔산의 인간상 Ⅵ. 맺음말  

제3부 구인선진의 종교사적 위상

구인선진을 통해 본 원불교의 이상적 인간상 /허남진  
Ⅰ. 머리말 Ⅱ. 구인제자와 원불교 창립정신  
Ⅲ. 일심합력(一心合力)하는 인간 Ⅳ. 순교하는 인간 : 봉공인
Ⅴ. 맺음말  

도덕의 정치 복원과 원불교 신앙 모델로서의 구인선진 /조성면  
Ⅰ. 사표이며 질문으로서 구인선진 Ⅱ. 구인선진의 이력과 공적  
Ⅲ. 구인선진의 삼대공덕(三大功德)과 활동 Ⅳ. 도덕의 정치와 ‘구인선진 되기’ 

원불교 구인선진의 인물 콘텐츠 개발을 위한 스토리텔링 /김미경
Ⅰ. 머리말 Ⅱ. 원불교 구인선진과 인물 콘텐츠 스토리텔링  
Ⅲ. 맺음말


소태산이 물질과 정신의 개벽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 영육쌍전(靈肉雙全)’과 ‘이소성대(以小成大)’ 정신이었다. 이 두 가지 종교적 구현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폐를 해결하려는 종교적 실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태산이 제시한 ‘영육쌍전’과 ‘이소성대’라는 두 가지 정신이 종교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구인선진이라는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신성과 복종·희생적 정열·실천적 추진력 그리고 개척정신 등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 p.120

원불교는 생활종교로서 경제적 자립도가 매우 높고 건실한 재정적인 안정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종교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하에서 원불교 교단 내적으로는 남녀 구분 없이 교육을 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야학을 설치하여 일본식 교육 체제에서 가르치지 못하였던 한글을 가르치면서 사회의 제도와 모순을 혁신할 수 있는 지도자 양성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정신개벽의 요람을 만들고자 하였다. --- p.202

저축조합운동으로 모인 금액은 초기 교단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소태산은 조합원인 제자들에게 명하여 그동안의 저축금으로 숯을 사 두라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 마을 부호 한 사람에게 빚 4백 원을 차용했으며, 손수 준비해 둔 사재 4백 원도 판출 제공하여 숯을 사 두게 하니, 7~8개월 후 그 값이 일약 10배로 폭등하여 조합은 1년 안에 큰 자금을 이루게 되어 그 뒤 전개한 방언공사 자금에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저축조합운동은 원불교의 정신적·경제적 기초가 확립되는 등 교단의 교체(敎體) 성립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칠산이 39세 되던 원기3년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간석지 방언공사를 명하였다. 이에 칠산은 구인단원의 일원으로서 정신·육신·물질 삼 방면으로 혈심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며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 시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 방언공사는 원기3년(1918) 3월에 시작해서 1년의 공정을 거쳐 원기4년 음력 3월 방언공사가 완공되어 영광 길룡리에 2만 6천 평의 논이 만들어졌다. --- p.311

소태산은 오랜 구도 과정을 거쳐 대각을 이루고 인간 개조와 사회 개조를 강조하였다. 가장 잘 훈련된 인간은 공도에 헌신하여 공익의 보람을 실현하는 인간을 말하고 사회에 나아가 희생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인간을 말한다. 소태산은 ‘공도자 숭배(公道者 崇拜)’를 사요(四要)에 포함시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희생하면서 공인에게 이익을 주는 공도정신(公道精神)을 실천한 사람을 존경하고 숭상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공도자 숭배의 강령은 공도에 헌신하는 공익 사회를 형성하며 자기 자신도 공도에 직접 헌신해서 세계 인류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개인이나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 삶을 버리고 대아(大我)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하고 공중을 위해 무아봉공하는 인간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도자 숭배’는 공중(公衆)을 위하여 공헌을 많이 하는 공로자를 널리 숭배하고 나아가 직접 공도에 헌신하자는 것이다. 세상에 ‘나’ 혼자만 살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나’는 사은의 공물(公物)임을 깊이 자각하여 공도 헌신자를 숭배함과 동시에 각자 불보살의 희생적인 무아봉공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신·육신·물질로 공도에 헌신하자는 것이다. --- p.388


개교 백주년의 원불교: 한국종교사의 기적 

2016년 올해로 ‘개교’(開?) 1백 주년을 맞이한 원불교(圓佛?)는 동학과 증산교의 뒤를 이어 우리 땅에서 자생한 대표적인 개벽(開闢)계열 신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원불교 교조(?祖)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少太山 朴重彬, 1891-1943, 이하 소태산)는 1860년에 성립된 동학(東學)과 1901년에 창시된 증산교 등이 앞장서서 실현하고자 했던 ‘개벽’(開闢)의 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한반도 발(發)인류문명 개벽을 실현하고자 1916년에 원불교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적 수난의 시기에 그 첫 걸음을 시작한 원불교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원불교는 개교 초기부터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크고 작은 탄압에 시달려야 했으며, 1945년 8.15해방 이후에는 해방정국의 좌우갈등과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고통스런 시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은 권위주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중의 과제에 대응해야만 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역경에 역경을 거듭해 온 한국근현대사와 그 길을 나란히 걸어 온 원불교의 현재 모습은 괄목할 만하다. 원불교는 현재 국내 6백여 개의 교당과 2백 여개소의 사회복지시설, 수십 곳을 헤아리는 교육기관을 경영하고 있는 외에, 최근에는 텔레비전 방송국까지 개국하여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원불교는 비단 국내에서만 크게 성장한 것이 아니라 해외 포교 분야에서도 타 종단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 23개 나라에 교당이 설립되어 있고, ‘삼동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봉사단체를 통한 해외봉사에도 큰 실적을 쌓고 있다. 지난 5월 1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10개 언어로 번역된 원불교경전이 해외에서 참가한 원불교 교도들에게 전달되기도 하였다. 이 뿐이 아니다. 원불교는 영산성지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안교육 분야, 교당별 햇빛발전소 설치를 통한 탈핵운동 분야, 전남 영광에 있는 간척지 ‘정관평’을 활용한 유기농운동 분야, 북한 어린이 돕기를 비롯한 통일운동 분야, 1960년대부터 참여한 종교간 대화와 협력운동 분야 등에서도 모범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하여 원불교가 지난 1백년 간 쌓아온 성과는 학계와 종교계에서 ‘한국종교사의 일대 기적’이라고까지 칭송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시련이 거듭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걸어온 원불교는 어떻게 해서 ‘한국종교사의 일대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교조 소태산이 보여준 ‘특별했던 삶’과 그 ‘특별했던 삶’을 닮아가고자 소태산에게 남 먼저 귀의하여 원불교 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구인선진’, 곧 소태산의 아홉 제자들이 보여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삶에 있었다는 것이 원불교 교단 안팎의 통설이다.

소태산 교조와 그의 아홉제자  

조선왕조 말기, 서세동점 아래에서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1891년에 태어나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자행되던 1916년에 진리를 깨달아 원불교를 창시하고, 이후 28년간에 걸쳐 ‘정신개벽(精神開闢)’을 기치로 한 새 문명건설 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에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원불교 교조 소태산의 ‘특별했던 삶’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교단 바깥으로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소태산의 특별했던 삶과 사상을 알기 쉽게 풀어 널리 소개한 이는 한겨레신문의 윤석인 기자였다. 한겨레신문은 창간 초기에 한국 근현대에 활약했던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발굴하여 지면에 소개하는 특집을 꾸몄는데, 그 특집에서 윤석인 기자는 소태산을 종교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1인으로 선정하여 소개함으로써 원불교의 대중적 인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였다.(『발굴현대사인물』상, 한겨레신문사, 1991 참조) 

개교 1백 주년이 된 올해에 소태산의 삶과 그의 가르침은 다시 한 번 한국사회로부터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형수 작가에 의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태산의 평전이 나왔고(『소태산평전』, 문학동네, 2016), 소태산의 가르침을 담은 언행록『대종경』이 이철수 화백의 손에 의해 판화로 새겨져 전시됨으로써 소태산은 시민들 사이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교단 외부 인사들로부터 주목받았던 소태산 교조와는 달리, 초기불교 당시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공자의 제자들인 공문십철, 그리고 예수의 십이사도 등에 비견되는 소태산의 아홉 제자는 원불교 교단 바깥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원불교가 떠들썩한 선전이나 공개적인 포교 활동보다는 이른바 ‘조용한 포교’ 즉 자기 수양과 내실 위주의 성장정책을 펼쳐 온 것도 한 가지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태산의 아홉 제자가 교단 안팎에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 계기는 지난 해에 교단 최고의결기관인 수위단회(首位團會)의 의결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원불교 수위단회는 2015년 5월에 소태산의 아홉 제자를 종사위(宗師位), 곧 교조 소태산 다음 반열의 '성인'(聖人)으로 추존할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개교 1백 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식전(2016.5.1)에서 ‘종사위’ 추존 서훈의식도 함께 거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원불교의 교립대학인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측에서는 기념대회 직전인 지난 4월 8일에 아홉 제자의 거룩한 삶과 사상을 기리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간 베일에 쌓여왔던 소태산의 아홉 제자의 인간적 면모와 그들이 보여준 종교적 삶의 모습이 한국 사회에 널리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선진〉에서는 교조 소태산과 그의 아홉 제자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이른바 ‘영산시대’로 불리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를 무대로 원불교 창립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소태산의 아홉 제자는 저축조합이라는 일종의 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새로운 공동체건설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 성과를 토대로 간척지 개척운동을 벌여 3만여 평의 농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간척지 개척을 마무리 지은 뒤에는 ‘창생을 위해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정신으로 기도결사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새 종교 원불교 창립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제 2부: 구인선진의 생애와 사상〉에서는 소태산의 아홉 제자 각각의 삶과 사상이 다양한 필진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홉 제자의 대부분은 교조 소태산의 친척이나 지인들이었으며, 소태산보다 나이가 연상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교조 소태산이 고향을 떠나지 않는 가운데 구도(求道)와 대각(大覺; 진리를 깨달음)을 이루는 동시에, 초기포교 활동 역시 고향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정산 송규를 수제자로 삼는 소태산의 파격(破格)에 대해서 다른 여덟 명의 제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지지를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내용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 3부: 구인선진의 종교사적 위상〉은 주로 원불교 교단 바깥의 연구자들이 소태산의 아홉제자가 보여준 종교적 삶과 그 가르침에 나타난 종교사적 의의, 신앙적 의미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소태산의 아홉 제자들이 남긴 삶의 발자취가 ‘인물 콘텐츠 스토리텔링’ 자료로써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재미와 교훈’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논증한 스토리텔링 전문가의 연구결과는 주목에 값하는 의미 있는 성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 제자의 종교적 면모의 일단

『원불교 구인선진, 개벽을 열다』에서 다루고 있는 소태산의 아홉 제자란 일산 이재철(1891-1943), 이산 이순순(1879-1945), 삼산 김기천(1890-1935), 사산 오창건(1887-1953), 오산 박세철(1879-1926), 육산 박동국(1897-1950), 칠산 유건(1880-1963), 팔산(1879-1939), 정산 송규(1900-1962) 등 9인을 지칭한다. 이하에서는 그들 아홉 제자들의 종교적 면모의 일단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일산 이재철(1891-1943)
소태산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열반했다. 그의 부친은 동학농민군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바 있다. 원불교 초창기에 재정산업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외교에도 능했다. 소태산 교조가 전개했던 저축조합운동을 모범삼아 고향에 ‘신흥저축조합’을 결성하여 경제자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함평 이씨 문중에서는 그의 뒤를 이어 수십 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이산 이순순(1879-1945)
소태산 교조보다 12세 연상으로 소태산과 같은 동네 출신이다. 젊은 소태산이 힘겨운 구도를 계속하던 1900년대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소태산을 후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태산이 진리를 깨닫고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하자 남 먼저 귀의하여 저축조합운동, 간척지 개척운동, 기도결사운동 참여하여 아홉 제자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기도결사운동을 마친 뒤에 재가(在家) 교도로써 활동하였다. 

삼산 김기천(1890-1935)
1928년에 스승 소태산으로부터 원불교 최초로 ‘견성’(見性: 진리를 깨달음) 인가를 받을 정도로 수행이 깊고 철저했으며, 진리에 대한 탐구열이 강했다. 1917년 소태산이 전개했던 저축조합운동을 모델로 삼아 자신의 동네에 ‘천정조합’이라는 조합을 결성,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한 바있다. 1933년에 지은 「교리송」, 1935년에 지은 「심월송」 등은 그의 오도(悟道)의 경지가 유감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의『철자집』이란 저술은 지금도 원불교 교단에서 한문 교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산 오창건(1887-1953)
소태산 교조 재세 당시 늘 지게에 무거운 짐을 싣고 운반하는 고역(苦役)을 기꺼이 감당할 만큼 체면과 형식을 뛰어넘은 알뜰한 제자이다. 얼굴 모습이 소태산을 많이 닮아 ‘리틀(작은) 소태산’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원불교 초창의 모든 교당 건축공사 감역을 도맡았으며, 특히 1937년 부산 초량교당 신축 당시 이제 갓 기초만 세운 교당이 폭풍우에 무너질까 밤새워 공사 현장을 지켰던 일화는 큰 감동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오산 박세철(1879-1926)
키도 작고 얼굴은 볼품 없었지만 소태산이 ‘조선 총독과도 안 바꿀 인물’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세상과 창생을 위한 희생적 삶’을 살다간 전형적인 공심가(公心家)이다. 소태산보다 12세 연상이며 아홉 제자 가운데에서는 가장 먼저 열반에 든 제자이다. 그는 사후에 원불교 교단 최초로 ‘법강항마위’ 즉 ‘성인’의 위에 추존되었다. 

육산 박동국(1897-1950)
소태산의 친동생이다. 소태산이 구도에 몰두할 때 형을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도맡았다. 1916년에 형인 소태산이 진리를 깨달아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할 때, 혈육의 관계를 뛰어넘어 제자로 입문하여 원불교 창립의 경제적, 정신적 기초를 닦는 데 헌신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중 전남 영광을 중심으로 한 좌우대립 과정에서 희생당하였다.

칠산 유건(1880-1963)
소태산의 외삼촌으로 11세 연상이다. 제자로 입문한 직후에는 소태산과 ‘맞담배를 피우는 사이’였지만, 곧바로 “(소태산이 비록) 육신은 생질(조카)이지만 도덕은 지존(至尊)이시다”라며 앞장서서 소태산을 스승으로 모시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아홉 제자 가운데 1차 간척지 공사(1918-1919) 및 2차(1956-1960) 간척지 공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제자이며,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기도 하다.

팔산 김광선(1879-1939)
소태산과 같은 동리 출신으로 12세 연상이다. 소태산의 구도 당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916년에 소태산이 새로운 종교의 교문을 연 이후에도 한결같은 정성으로 보필하였다. 1919년 4월에 준공한 간척지 둑에 구멍이 생겨 둑이 유실될 염려가 있을 때 온몸을 던져 무너져가는 둑을 막은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1939년에 팔산이 열반하자 소태산은 〈팔산의 영을 위하여〉라는 특별 법설을 내릴 정도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장남인 김홍철 역시 소태산에 귀의하여 부친 팔산과 함께 부자(父子)가 함께 ‘종사위’라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었다.  

정산 송규(1900-1962)
소태산의 아홉 제자 가운데 가장 젊은 제자이자 유일한 외지(外地 경상북도)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경상북도 성주에서 퇴계학의 학통을 이은 야성 송씨이다. 소태산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오늘날의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의 기본적 틀을 닦은 ‘소태산의 이데올로그’이다. 소태산 재세시 이미 ‘수제자’로 뽑혔으며, 1943년 소태산 열반 직후, 소태산의 뒤를 이어 제 2대 종ㅂ법사에 취임, 1962년 열반하기까지 20년간 원불교를 이끌었다. 그가 열반 직전에 남긴 “동원도리, 동기연계, 동척사업”의 〈삼동윤리〉(三同倫理)는 세계 보편윤리로 손색이 없는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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