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백범은 아직 약관도 안 된 청년이었는데, 동학지도자인 듯한 갓을 쓴 양반이 나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공순하게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백범 선생이 당황해서 왜 이렇게 절을 하시냐고 말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스승님 가르침에는 사람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백범일지????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님을 모시고 동학에 뛰어들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고 하는 동학의 만민평등사상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학은 신분적 평등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도 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충청도 서산에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홍종식이라는 분이 있다. 이 분이 남긴 ????동학란실화????라는 수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1920년대에 후학들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왜 선생님은 동학에 뛰어 드셨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동학에 뛰어들면 그날부터 굶는 사람이 없었다. 밥이고 뭐고 다 나눠 먹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상의 뿌리를 찾아보니 1860년 동학 창도 초기부터 유무상자(有無相資)라고 해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돕는” 전통이 혁명 기간 내내 살아있었다.
1888년이 무자년인데, 무자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나올 정도로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다. 전라도 고부 일대는 땅이 다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자년 대흉년 때에 해월 최시형 선생이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경통(敬通)’이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거기에 보면 “ 형은 따뜻한 밥을 먹고 동생은 굶는다면 이것이 옳겠는가? 나누어라! 동생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는데, 형은 추위에 떨고 있다면 이것이 옳겠는가? 나누어라!”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때까지도 그대로 실천이 된 것이다. 동학에 뛰어들면 양반이고 상놈이고, 남자고 여자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유무상자(有無相資)를 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돈에 의해서, 권력, 지위, 성별, 민족에 의해서, 사람이 하늘이 아니라 수단화되어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인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미국에서 코로나 희생자의 대다수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과 히스패닉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슬럼가처럼 환경이 열악한 곳에 살고 있고 경제적 수준이 낮다 보니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동학에서 말하는 “사람이 하늘이다”와 “유무상자”의 사상은 코로나 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사상이 아닐까?
끝으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의미 있는 변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도 ????창작과 비평???? 봄호는 “3·1운동 백주년 특집호”였다. 여기에 백낙청·임형택·백영서 세 분이 공통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과 개벽파의 재발견”을 역설하고 있다. 핵심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서구의 학문, 서구의 틀, 서구의 운동을 수용하는 개화파 중심으로만 역사를 써 오고, 이해해 왔는데, 그게 제대로 된 이해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에게 맞고, 앞으로 살려 나가야 하는 우리의 토착사상이나 자생운동은 없었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동학사상이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세 분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단히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