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은 코로나에 어떻게 대응했나?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
전북 익산에 자리하고 있는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한지 1년 반이 지났다. 처음 1년 정도는 대학의 살림살이를 파악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뭔가 나름대로의 공약도 내걸고, 학교를 혁신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불철주야 노력하던 중, 하늘도 무심하게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큰 탈 없이 견디고 있는데, 그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전북 최초의 확진자 발생
지난 1월 20일, 우한에서 입국한 중국인 여성이 인천공항 검역 과정에서 첫 번째 확진자 판정을 받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8번 환자가 전북 군산에서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군산의료원의 검사시스템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환자 자체는 이미 양성인데 음성 상태로 우리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온 것이다. 마침 그날은 휴일이었는데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당직 의사가 운 좋게도 우리 대학병원 전체에 단 한 명 있는 감염내과 교수였다. 전문 분야가 감염내과였기에 당직의사는 호흡기 질환이나 코로나19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다. 그래서 군산에서 이송되어 온 환자가 음성판정 상태이기는 했지만 조금 이상하다 싶어 도착하자마자 격리조치를 실시하고, 곧바로 보건소와 연락해서 몇 시간 만에 코로나19 확진 판정이 나왔다. 전라북도 최초의 확진자가 우리 병원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 대응과정에서 30분 내지 1시간 정도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 몇 사람이 밀접 접촉자가 되긴 했지만 해당 환자를 응급실로 보내지 않고 곧바로 격리병실로 보냈기 때문에 큰 폭풍을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에 그때 감염내과 교수가 아닌 다른 의사가 그 환자를 맞이했거나, 아니면 보통의 응급환자처럼 응급실로 모셨다면, 아마 우리 병원 안에서 수십 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대학은 물론 익산시 전체가 긴급 상황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여튼, 초동 대응을 잘한 덕분에 담당 교수는 ‘영웅’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거의 3-4일에 한 번 꼴로 의심환자가 발생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를 비롯한 대학 구성원들은 몇 시간씩 또는 며칠씩 마음을 졸이면서 최종판정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확진자가 군산, 전주, 김제 등지에서 나오고, 가까운 이웃대학들에서도 나왔지만 다행히 우리 대학에서는 지금까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사실은 8번 환자가 확진됐을 때 원광대학교는 전국 대학 최초로 총장을 책임자로 하는 코로나19 상황실을 설치하여 비상사태 선언을 하고 주요 보직을 맡은 교수님들과 교직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다.
“1세기 전에 동학(東學)을 이끄셨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님은 ‘인시천(人是天)이니 사인여천(事人如天)하여라.’ 곧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모든 경제적인 것, 행정적인 것을 다 동원해서 우리 구성원들을 하늘님으로 모시는 마음으로, 생명이 제일이라는 자세로 상황실을 설치해서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합시다.” 라고
아마도 평생 동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동학의 가르침을 배워 알고 있었기에 위와 같은 말씀을 드렸으며, 바로 그런 정신으로 총력 대응을 해 온 결과 지금까지는 무사히 학교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렇게 원광대학교를 중심으로 안전지대를 확보했기 때문에 대구에서 대량의 환자가 발생하여 중증 환자들을 수용할 병원이 없었을 때, 우리 원광대학교 병원은 일곱 분의 중증 환자를 모실 수 있었다.
영호남 대학의 연계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구에서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에 우리대학과 자매 대학들인 대구의 영남대학교와 계명대학교, 그리고 고교동기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대구의 모 대학교에 소량의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보냈다. 조금이나마 대구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뒤 어느 날, 영남대학교 총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3월 2일 이른 아침이었다. 영남대학교와 인연이 깊은 어르신이 원광대 음압병실로 이송되고 있다는 것이다. 70대 중반의 중증 환자인데 가족들이 따라갈 수 없어서 보건소 직원과 운전사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로하신 어르신을 타지에 혼자 보내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전화를 받은 직후 곧장 음압병실로 달려갔다. 마침 주치의가 1년 전까지 서울삼성병원에서 메르스 사태를 겪었던 교수였다. 그 교수는 산교육을 이미 마친 셈이었다. 이것도 묘한 인연이었다. 대구에서 오신 환자분은 3월 2일부터 48일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4월 17일에 완치가 돼서 댁으로 귀가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더 감격스러운 일은, 이분이 가족도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오셨을 텐데, 48일 동안 간호사들이 입 주위가 다 터지고, 마스크로 얼굴에 진물이 생길 정도로 눈물겨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감동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그냥 가실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떠나시기 전날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서 원광대학교병원 발전기금으로 큰 금액을 기부해 주셨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코로나19가 영호남의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뜻깊은 일이었다. 영남대 총장님께 “앞으로도 협력 네트워크를 잘 발전시킵시다!”라고 감사 전화를 드린 기억이 새롭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대학 간의 연계는 국경도 넘어섰다. 원광대학의 자매대학이 중국에 여러 곳 있는데, 우한에서 코로나가 발발했을 때 8개 대학에 마스크를 1천 장씩 보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최근에 중국 각 대학 총장님으로부터 감사편지와 함께 5섯 배의 마스크가 돌아왔다. 주한 중국대사와 광주에 있는 중국총영사로부터도 감사장이 왔다. 이런 식으로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중국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가 끝나게 되면 전보다 더 많은 중국 유학생들이 원광대로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동체정신의 부활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국내외 대학간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대응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